이제 치킨잼 시상도 끝났으니 가벼운 마음으로 정리해볼까 합니다. …라고 쓴 지 한 달이 되었다….
'카페 레반트' 게임의 강력한 스포일러와 단편소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알만툴 그거 엄청 노가다해야 하는 툴 아니에요?
매년 치킨잼 소식을 볼 때마다 참여하고 싶어했으면서 결국 참여하지 못한 까닭이 있었습니다. 알만툴에 대한 편견(이랄까 반 정도는 사실?). 제가 알만툴 개발 방식을 굉장히 어려워해요. if else나 while을 사용할 수 없고 한글로 된 스위치나 변수 제어 방식을 하나하나 클릭해서 사용해야 한다는 점. 컴퓨터 언어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큰 장점이 될 수 있는 개발 방식이지만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키보드로 if… else… 하고 타닥타닥 타이핑하는 게 훨씬 쉽다고 느껴지는 것이었어요. 게임 하나를 만들고 난 뒤에도 그 생각은 여전합니다만 그래도 제가 각오했던 정도보다는 다행히 훨씬 쉽게 개발할 수 있더라고요. 노가다는 맞고 복잡한 선택지 하나 작성할 때마다 정신이 아득해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벤트와 스위치를 잘 쓰면 어느 정도 커버가 되더군요. 아직 고급 기교(?)를 부리기에는 알만툴 초보자입니다만.
이번 주제는 '관리'
아무튼 그런 알만툴에 대한 편견 때문에 주제를 보고도 아무 생각이 나지 않으면 그냥 참가하지 말자… 생각하기는 했어요. 그런데 주제를 보니 생각나는, 오래 전부터 한번쯤 만들어보고 싶어하던 테마가 있었습니다. 저는 '이야기'를 만들 때는 늘 나중에 밝혀지는 '비밀'을 넣고 싶어해요. 그것을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하는 테크닉은 많이 부족하지만 이야기가 해소되고 정리되는 시점에 '아! 그게 그래서 이렇게 된 거구나' 하고 무릎을 치게 되는 이야기를 만드는 일이 꿈입니다. 그리고 '관리' 라는 테마는 좋아하는 단편소설 하나를 생각나게 했어요. 어슐러 르 귄의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마을은 모든 것을 짊어진 한 명의 희생자를 숨긴 채 '관리'되고 있죠. 이 소설을 모티브로 '관리'라는 테마를 살려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사골처럼 우려먹는 게임 빙의
현대인이 게임이나 소설, 판타지 세계에 빙의하는 내용은… 제가 원래 좀 이 소재를 많이 좋아해서요. 웹소설도 오만 가지 현대인 빙의 소재의 현판을 엄청나게 읽고 있고, 써보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했고요(결국 쓰지는 못했습니다만). 그래서 이번에 같이 녹여 보고 싶었습니다. 사실 게임에 빙의한 게임(?)을 만들려고 하니 조금 묘한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요. 소설이라면 글로 묘사할 수 있는 본래 게임의 시스템을 핍진성 있게 제작해야 하나? 하는 고민이 들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안 했습니다! 지금 보여주어야 하는 부분은 게임 속 게임이 아니라 표면의 게임일 뿐이니까요. 게임 속 게임은 카페 타이쿤이지만 게임은 시뮬레이션일 뿐이니 음료 제조 파트보다는 코드 삽입에 좀더 힘을 주는 방식으로 말이죠.
내가 원하는 만큼만 써먹고 싶다
현대인 빙의자가 등장하는 창작물의 구성은 보통 이런 식이죠. '나만이 이 게임/소설/만화의 엔딩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엔딩을 향해 달려가거나 엔딩을 거부하기 위해 애쓰곤 해요. 골자는 '일어날 일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용한다' 입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이걸 게임 플레이로 써먹기가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뺐습니다. 제가 쓰고 싶었던 게임 빙의물의 요소는 '남들이 알지 못하는 현대 용어와 개념을 이용한다', '한 프레임 너머에서 이 세계를 조망할 수 있다' 였기 때문에. 그래서 초반부터 '내가 알던 게임 흐름과는 다른데?' 라는 방식으로 진행했습니다. 이 방식을 다소 어색하게 우겨넣었다는 반성은 있습니다 mm) 저의 능력 부족이었어요.
하는 김에 한 번만 더 꼬아보자
그렇지만 기왕 '미래를 알고 바꾼다' 요소를 제외한다면 거기에도 까닭을 넣고 싶기는 했습니다. 그래서 한 번 더 이야기를 뒤집을 만한 방법을 생각하려고 애썼어요. '게임에 빙의했다'를 '그런데 사실은' '게임에 빙의한 것이 아니었다'로 바꾸기로 한 거죠. 그렇다면 어째서 게임에 빙의한 것처럼 보이나? 그리고 어째서 게임에 빙의한 것 같은 특수 능력을 쓸 수 있나? 사실 주인공은 이 세계의 불행을 짊어지고 있는 '지하실'의 사람들 중 한 명이었고, '지하실'에서 불행을 겪던 끝에 특수한 능력을 얻게 된 거죠. 그것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현대' 라는 세계에 대한 생각(망상)과 이 세계를 '프로그래밍' 할 수 있는 능력이었어요. 그 망상을 붙잡고 버티다가 '지하실'에서 탈출해 다른 사람들을 구하려고 했지만 탈출 후 '현대'에 대한 망상이 커져 하려던 일을 덮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걸… 표현하고 싶었지만! 역시 많이 부족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떡밥을 열심히 깐다고 깔았지만 부족해서, 마지막에 '어? 뭐가 갑자기 어떻게 된 거라고?' 라는 반응이 있는 것도 충분히 그럴 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수정한다면 이 부분도 좀더 납득할 만하도록 플레이 도중에 실마리를 넣어서 플레이하면서 자연스럽게 알 수 있도록 하고 싶네요.
카페를 관리하며 뒷이야기를 깨닫기
그렇게 기본 설정을 꾸려 놓고 게임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플레이 방식은 '음료를 만들고, 코드를 수정하고, 수정한 코드를 반영하기' 지요. 이렇게 카페를 관리하는 플레이를 계속해 나가면서 게임의 밝혀지지 않은 뒷설정을 알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행복과 불행의 총량이 같은 이 세계에서 누군가 행복을 독점하고 있고, 그래서 누군가에게 불행이 떠넘겨지고 있다는 점이나 그러한 시스템을 주인공이 바꿀 능력이 있다는 점, '지하실'의 사람들과 거기에서 탈출한 몇몇 사람들이 이 시스템을 뒤엎고 싶어한다는 점 같은 것이요. 게임만 플레이했을 때 이 사실들이 얼마나 알 수 있도록 표현됐는지…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이걸 읽고 나서야 '그런 거였어?' 하시는 분들이 많을지도 모르겠어요. 엔딩을 보고 나서 '그래서 뭐였던 거지?' 하신 분들도 많으셨던 걸까요? 개인적인 바람은 여기의 내용이 모두 표현되지 못했다고 해도 게임을 전부 플레이하고 난 뒤에는 나름대로 '이게 그런 거였나?' 하는 정도의 납득할 만한 이야기가 게임 속에 있었다면 좋겠다… 고는 생각하지만, 만약 리메이크한다면 떡밥을 좀 촘촘하게 깔고 싶기는 해요. 변명을 하자면… 전체 이야기를 다듬을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한 달! 너무 짧아!
완성 후 분석
이제 완성해서 제출한 지도 달포가 흘러가서 기억이 가물가물하기는 하지만요. 일단 잘한 점은… 완성해서 제출했다! 한 달! 지난 번 게임은 3주였죠. 이번 게임은 좀더 복잡하고 좀더 작업이 많이 필요했지만 어쨌든 한 달 안에 무사히(?) 완성했습니다. 나 최고다. 멋있다. 첫 번째 게임을 만들고 나서 '그래픽 요소를 넣겠다'고 생각했던 것도… 이번에도 부족하기는 했지만 예쁜 그래픽 에셋을 사용해서 전체적으로 통일된 그래픽으로 깔끔하게 작업했다는 점이 꽤 성공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에셋 너무 좋아서… 사실 이 에셋을 이용해서 다른 게임도 만들고 있어요. 너무 이것만 사용하는 작업도 또 좋은 방식은 아니겠지만 아무튼 제 눈에도 예쁜 결과물이 나왔다는 점은 좋습니다.
시나리오에서는 일단 의도한 떡밥이 플레이어분들께 모두 보이지 않았다는 점은 인지했습니다. 나중에 수정한다면 전체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써 둔 상태에서 앞뒤를 다듬어 떡밥을 깔아 보는 작업을 꼭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세상에나 그걸 안 했다고? 안… 아니 못… 했습니다. 하고는 싶었는데 너무 바빴고 알만툴 게임은 전체 이야기를 보거나 전에 이미 써 둔 이벤트를 수정하기가 너무 불편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기획 단에서 미리 모든 이야기를 다듬어 둔 뒤 알만툴을 사용할 때는 이미 완성된 이야기를 옮기는 정도로 작업했어야 하는데. 그래서… 이번에 새로 하고 있는 작업은 알만툴로 제작하지만 알만툴을 직접 사용해 스크립트를 넣기 전 기획을 다듬는 과정을 제법 꼼꼼하게 하고 있습니다. 또 게임을 구현하다 보면 수정하고 뒤엉키는 부분이 있겠지만 일단 할 수 있는 대로 최대한 정돈하고 시작해 보려고요.
게임 플레이는… 최근에 잘 만든 알만툴 게임 몇 가지를 구경하다 보니 카페 레반트의 반복되는 게임 플레이가 지루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하지만 '카페'라는 맵 안에서 모든 일이 일어나는 구성은 저는 꽤 마음에 들기 때문에, 이것을 어떻게 지루하지 않고 다채롭게 풀어나갈 수 있을지도 고민해 볼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남의 게임을 보는 일에도 배울 점이 엄청 많다는 사실을 요즘 새삼 깨닫고 있어요. 알만툴 게임에는 알만툴 게임만의 특징이 있다 보니 더더욱. 퍼즐을 넣는 일도 '게임 플레이에 방해되지 않나?' 싶어서 좀 저어했는데 잘 배치한 퍼즐은 게임을 한다는 감각을 더 높여주더라고요. 그런 것을 해보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S와 C 버튼을 누르는 일은 좋은 게임 플레이 방식이었던가… 생각도 해 보고요. 프로그래밍을 한다는 감각을 주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오히려 귀찮은 수행이 되었을까 싶기도 하고요. 차라리 좀더 머리를 써야 하는 방식이 나으려나? 곰곰했어요.
그리고 남은 생각 조각들
리메이크한다면! 카페 이름(제목)을 바꾸겠습니다… 아니, 저는 '레반트'라는 말의 어감과 단어 뜻이 예뻐서 썼거든요. 검색해 봐도 그다지 결과가 많지는 않아서 괜찮을 것 같았고. 게임잼 기간 전후로 전쟁이 일어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셀프서치를 해 보면 레반트 지역의 전쟁 이야기만 잔뜩 나와서 좀 슬퍼지더라고요. 리메이크하면 카페는 개명합니다.
맞춤법 검사기는 부끄럽지만 바빠서 못 돌렸습니다. 초콜릿을 초콜렛으로 쓴 것은 몰라서… 였어요. 나머지 맞춤법이 잘 맞았다니 정말 다행이지만요. 평소에 띄어쓰기를 좀 헷갈려하는 편이기는 하지만 맞춤법에는 그나마 익숙한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잘 됐지요.
보스전도… 전투 구현 너무 어려웠습니다. 이제 이 핑계도 염치없지만 시간과 예산을 조금 더 주셨다면! 마지막에 마음이 급해서 허겁지겁 만들다 보니 빠듯한 전투가 되었답니다. 이후에 시나리오뿐 아니라 시스템도 좀더 기획을 잘 해서 다듬어 볼 수 있다면 좋겠어요.
퀘스트 알림 말풍선이나 아이템의 NEW 표시 같은 것도 신경써서 구현해 두었기에 알아봐 주시고 좋아해 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기뻤답니다. 인디 게임이란 꾸밈을 잘 다듬는 것보다는 송곳 같이 날카로운 장점이 하나 있어서 다른 모든 단점을 덮어버릴 수 있다면 더 좋다는 점… 저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날카로운 장점도 있고 꾸밈도 다듬어진 게임이 더 좋지 않겠어요. 저는 그런 편의성 요소를 다듬는 일을 좋아해서… 어차피 저 좋은 거 만들려고 인디 하는데요! 아직 날카로운 장점은 없지만 앞으로는 그것도 만들어 보도록 하겠어요.
언젠가 리메이크를 해보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시간이 부족했다'는 변명을 너무 많이 해서, 나중에 충분한 시간을 들여 리메이크를 한다면 얼마나 좋은 게임을 만들어야 하는지 제가 입으로 업보를 번 것 같다는 생각은 조금 들지만요. 하지만 이번에도 시간 안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했다고 생각하니까 후회는… 조금만 할래요. 완성의 경험을 쌓는 일과 디테일을 다듬는 일을 함께 해나가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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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8개
게임 빙의물 다른 창작물에서 많이 봤지만 정작 게임(특히 알만툴 게임)에서 본적은 많이 없어서 카페 레반트 컨셉 좋았어요 bb 저도 빙의물 게임 만들어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네요 😊
감사합니다! 제가 빙의물을 재밌어해서… 저의 재밌음이 좀 전달되었다면 기뻐요 ><)9 언젠가 어데이드님이 만들어 주실 빙의물 게임도 두근두근하며 기다려보겠습니다!
컨셉이 독특해서… 뾰족한 장점과 꾸밈 둘 다 잡았다고 생각해요. (요즘 제가 꾸밈을 좋아하는 유저 쪽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스토리도 말씀하신 부분 전부 전달됐어요! 의문점이 있다면… 그 세계에도 자바스크립트 게임 개발이 있는 것인지, 그냥 메타적인 설정인 거고 세계관 내적으로는 우연히 그런 망상을 하게 된 것인지 정도? 다음 게임도 기대하겠습니다!
우와앗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이 전달이 되었다면 또 기뻐요! 이 세계에는 자바스크립트 게임 개발은 없고, 이 세계의 힘이 작동하는 방식을 주인공이 '자바스크립트 게임 개발'의 망상으로 풀어서 이해해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느낌이네요. 리메이크하게 된다면 말씀해주신 것도 녹여볼 수 있게 해봐야겠어요. 감사합니다 ><)9
뭐랄까 그 세계는 "실제로" 자바스크립트기 때문에, 지하실에서 알아낸 것이 (그들은 모르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게임의 소스 코드다! 이 방향일수도 있을 것 같네요…
아니! 세상에. 그러게요. 그렇게 생각하면 메타성도 생기면서 더 이야기가 깊어지네요. 너무 멋진 생각이에요…!
개인적으로 컨셉 면에서 여러모로 재미있게 즐겼던 게임입니다! 개발자와 코드라는 컨셉에서 그걸 NPC들이나 음료를 만드는 컨셉이 여러모로 재미있었어요. 1달이라는 짧은 개발 기간 동안에 어쩔 수 없겠지만 추후에 여러 디테일 요소가 살려지면 더욱 좋겠다 싶었어요. 여러모로 제작 수고 많으셨으며 추후 리메이크도기대 하겠습니다!
재미가 있었다면 정말 기뻐요. 역시 마감이 있어야 완성을 하기는 하지만… 디테일이나 구성 등을 좀더 다듬어서 리메이크해보고 싶어지네요. 좋게 봐주신 덕에 더욱 해봐야겠다!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9